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을 이상향으로 삼고 그것을 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로 인해 문학과 미술은 문자 나 그림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중 심에 놓고 발전, 변용을 거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악의 경우는 달랐다. 고대 음악이 상당히 발달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완 비 된 기보법(현재의 ‘악보’)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계에 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이 르네상 스 시대를 대표할만한 독보적인 예술가들이 배출되지 못했고 본 격 클래식의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시대에 도래하게 된다.
일그러진 진주, 바로크
르네상스 시대 이후 찾아온 바로크 시대는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 는 포르투갈어인 ‘barrôco’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 격하다. 당시 사람들에게 ‘바로크 예술’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난, 인위적이고 기이한 인상을 줬다. 어떤 예술사조이든 초창기에는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것처럼, 불규칙성과 움직임, 과시의 미학을 추구하는 바로크 양식을 비판하는 견해도 많았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바로크 음악의 화성이 혼란스럽고 불협화음으로 가 득 차 있으며 어렵다고 평한 바 있다.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등 ‘현대 예술’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사람들의 비판과도 닮아 있다.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담은 바로크 음악
사실상 서양 고전음악의 뿌리는 바로크 음악이라 볼 수 있다. 비발 디, 바흐, 헨델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은 중세 교회음악에서 나아 가 화성과 멜로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음악의 기법들이 바로크 음악을 기점으로 비로 소 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음악을 통해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거기에 ‘리듬, 선 율, 화성’ 같은 수단이 활용되었고, 자연스럽게 작곡과 연주 두 측 면에서의 발전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 성악곡에서 기악곡 중심으로 음악적 흐름이 바뀌면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
헨델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음악 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세계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해 영국에서 활동했다. 주로 오페 라와 오라토리오 등 극음악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오라토리오『메시아』는 1742년 초연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 주되지 않았던 해가 없을 정도다. 헨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 이 새겨져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났던 음악가, 그의 음 악은 단순한 소리를 뛰어넘은 감성의 언어였고, 인간의 수많은 열 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마저도 모두 초월한 것이었다.”
구원의 음악, 오라토리오『메시아』
오라토리오란 성경 내용을 가사로 만든 악곡으로 합창과 기악 반 주가 동반된다. 헨델의 대표작이자 바로크 음악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메시아』는 특히 2부 마지막 곡인 ‘할렐루야’ 부분이 백미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니, (중략) 왕 중의 왕, 그의 통치는 영원하리라!”와 같은 가사로, 연말이면 세 계 곳곳의 교회에서 울려 퍼진다. 할렐루야가 시작될 땐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다. 이는 메시아가 공연되던 중, 할렐루야 의 “왕 중의 왕” 대목에서 영국 왕 조지 2세가 감동한 나머지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음악가들의 음악가, 헨델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난 직후 쓰러졌다. 헨델은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병상에 누웠고, 1주일 뒤 74세의 나이로 생 애를 마감했다. 그의 사후에도 헨델에 대한 후배 음악가들의 찬사는 이어졌다. 런던에서『메시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하이든 은 “직접 들어보기 전에는 헨델 음악의 위력을 절반도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으며, 베토벤은 “헨델의 음악은 진리 그 자체다. 그는 모 든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하다”라고 말했고, 대화 도중에 헨델의 이름 이 나올 때마다 무릎을 굽히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